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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세상


부처님은 밝은 마음으로 한발짝 다가서는 좋은인연에 복을 주십니다.
작성자 道窓스님
작성일 2008-03-19 (수) 08:17
ㆍ추천: 0  ㆍ조회: 5128  
불교사상의 전개-1


































 
불교사상의 전개

1. 근본불교

근본불교는 부처님의 생존시로부터 입멸 후 100년 내지 200년까지의 기간이 여기에 해당된다. 부처님이 교화활동에 전념한 약 50년을 포함하면 150년 내지 250년 동안 지속되었던 불교를 가리키는 것이다.

근본불교는 현실을 직시하고 실천함으로써 현실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려는 해결주의를 기본입장으로 하고 있다.



1) 불타당시의 사상계

불교의 개조인 샤카무니 붓다(Sakyamuni Buddha)가 출현하였던 기원전 6세기 무렵의 갠지스 강 중류지방은 사회적으로 크게 변화하고 있었다. 당시 인도는 강대한 신흥왕국의 출현과 도시의 형성 등으로 급격한 정치 사회적 변화가 일어났고 이에 따라 종교 사상계 또한 매우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인도의 고대문명은 기원전 3000년 경부터 시작하여 대략 1000년 동안에 걸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른바 인더스 문명으로 불리는데 오늘날 인더스강 유역의 하라빠와 모헨조다로 등 도시 유적들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이 고대문명은 문다족, 드라비다족 등을 비롯하여 일찍부터 인도대륙에 살아온 여러 종족들에 의해 이룩되어 왔다. 그러나 이후 인도의 문명은 코카서스 지방으로부터 인더스강 상류의 펀잡지방에 침입해 온 아리야인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아리야인들은 기원전 16에서 13세기 무렵 인더스 강 상류의 펀잡지방에 침입하여 기원전 11에서 9세기 무렵에는 이미 갠지즈강 상류지방으로 이주하였는데 시대가 흐름에 따라 계속 동방으로 진출하여 기원전 5세기 무렵에는 갠지스강 중류지방에 정착하였다. 이와 함께 이 지방에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현저한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먼저 당시 존재하고 있던 군소부족이 점차 통합되어 강대한 국가체계가 형성되었다. 초기불교 경전에 의하면 16대국이 존재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들 가운데서도 특히 강성했던 나라는 마가다, 코살라, 밤사, 아완띠 등이었으며 전제적인 국왕이 통치하는 군주정체의 이들 4대국에 의해 군소 국가들은 점차 합병되어 갔다. 그리하여 붓다시대에 이들 나라는 이미 갠지스강 중류지방에 각각 강대한 신흥왕국으로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신흥 왕국의 중심지는 도시였는데 특히 갠지스강 중류 지방의 여러 도시가 경제적으로 크게 번성하였다. 처음 이 지방으로 이주해온 아리야인 사회는 변함없이 종전과 같은 씨족제 농촌사회의 촌락 공동체를 기반으로 하였지만 농업생산의 증대, 상공업의 발달, 화폐 경제의 촉진, 인구의 집중화 등에 따라 곳곳에 도시를 형성하고 경제적 번영을 이루어 갔다.

이같은 국가적 정세에 부응하여 사회의 구성도 점차 변모하기에 이르렀다. 인도 사회구성의 두드러진 특징으로 들 수 있는 계급제도는 아리야인들이 갠지스강 상류지방에 이주하였던 시대에 확립된 것으로 일반적으로 사성(四姓) 계급제도라고 한다. 사성이란 바라문(Brahmana), 왕족들(ksatriya), 서민(vaisya), 노예(sudra) 등의 네 가지 계급을 가리킨다. 이 가운데 바라문은 제사와 종교의 권리를 독점하는 최상위의 계급이었으며, 정치력과 군사력을 장악하는 왕족이 그 다음에, 농업 목축업 상공업에 종사하는 서민이 그 뒤에 위치하였다. 그리고 비천한 노역에 종사는 노예가 최하위 계급에 속하였다. 이것을 근대에 와서 카스트라고 하였는데 원래 카스트란 개개의 계급집단을 가리키는 말이다. 어쨌든 이 사성계급은 인도 아리야인의 사회구성을 특징짓는 계급제도로서 이를 기반으로 하여 바라문교가 성립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계급제도가 점차 변모하기에 이르렀다.

이같은 변모와 관련하여 주목해야 할 것은 정치적 패자(覇者)로서의 국왕과 경제적 실력자로서 새롭게 등장한 자산가(資産家)이다. 국왕은 종전의 농촌사회에 있어서는 단순히 부족의 수장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동방의 신흥 왕국에서는 이들이 지방적 분권이기는 하지만 이미 국가의 지배자로서 그 지위를 갖기에 이르렀다. 또 자산가란 도시를 배경으로 한 상업 자본가나 지방의 거대한 토지의 소유자를 가리킨다. 이 시대에 이르러 이들은 서민 계급과는 구별되는 토지의 소유자를 하나의 사회적 신분으로 간주되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장자로 불리는 직업조합의 장들은 상업 자본가들의 대표로서 사회적으로 중요한 지위에 있었다.

이처럼 국왕이나 자산가가 사회에 커다란 세력을 가지게 됨에 따라 예로부터 내려오던 계급제도는 점차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인종적으로도 아리야인이 동방으로 진출하게 됨에 따라 시작한 원주민과의 혼혈은 계급 붕괴에 한층 더 박차를 가하였다. 그리하여 브라흐마나 문헌에서 사성(四姓)을 열거할 경우에 반드시 바라문, 왕족, 서민, 노예의 순서로 하여 바라문을 최상위에 두고 있지만 초기불교의 성전에는 거의 대부분이 왕족, 바라문, 서민, 노예의 순서로 나타난다. 즉 바라문과 왕족의 위치가 바뀌어져 있는 것이다. 원래부터 바라문의 세력은 농촌사회를 중심으로 뿌리깊게 잔존해 있었지만 도시를 중심으로 한 사회에서 옛날의 권위는 더 이상 지켜지지 않았다.



정통 바라문의 사상

사회 변동에 따라 사상계에도 새로운 움직임이 나타났다. 당시 철학이나 종교에 관한 사상가는 크게 바라문과 이들을 비판하면서 등장한 사문의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바라문은 예로부터 내려오던 베다 성전을 신봉하는 사제자로서 농촌 사회를 중심으로 하여 전고 다름없이 사상계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주술적 마술적인 제사를 주관하고 종교적 지도자로서의 지위를 갖고 있었다. 이러한 바라문의 사상은 베다(Veda), 브라흐마나(Brahmana), 아란야까(Aranyaka), 우빠니샤드(Upanisad)라는 일련의 문헌들을 통해 전개된 종교사상을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의 전개과정은 보통 3기로 구분되기도 한다.

베다는 인도에 이주해 온 아리야인들의 우주와 인간에 대한 사유방법과 종교적 지식을 모아 편찬한 성전의 명칭으로 리그베다(Rg-veda), 사마베다(Sama-veda), 아주르베다(Yajur-veda), 아타르바베다(Atharva-veda)의 네 가지가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이고 그 성립이 오래된 것은 리그베다로서 기원전 1500년에서 1000년 경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시기를 베다 시대라고 하며 바라문 문화의 제1기에 해당한다.

신들을 찬미하는 시가모음집인 리그베다에는 무수한 자연신들이 등장한다. 대개 태양이나 불, 바람, 강과 같은 자연 현상의 다양한 힘들, 또는 추상적인 관념들이 신격화되어 천신으로서 숭배되고 찬미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신들 가운데 인드라는 신체적 특징과 큰 위력을 갖춘 최고의 천신으로 묘사되고 있다. 신들의 거룩한 행위에 대한 찬미 외에도 리그베다는 부(富), 다산(多産), 장수(長壽), 승전(勝戰) 등과 같이 인간에게 유익한 것들을 간구하는 기원을 함께 담고 있다.

그러나 자연신교적이며 다신교적인 경향을 반영하는 이 시기에도 근원적인 세계의 원리를 탐구하는 사유가 싹트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그 중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우주창조에 관한 찬가들이다. 즉 우주와 모든 존재는 전능의 힘을 지닌 비슈와까르만(Visvakarman)이 집을 짓듯이 만들었다고 하거나, 또는 모든 피조물들이 주(主)라고 불리는 아버지 신인 쁘라자빠띠(Prajapati)가 우주를 출생시켰다고 한다. 우주의 근원에 관한 이런 사유들이 리그베다의 노래를 통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신들에 대한 찬미, 기원과 관련하여 베다 시대 인도인들의 삶 속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은 의례와 제사였다. 기원전1000에서 800년 경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 브라흐마나는 이러한 의례와 제사에 관한 규정을 자세하게 밝힌 문헌들이다. 따라서 제사가 중심이 되었던 이 시대를 브라흐마나, 즉 범서(梵書) 시대라고 부르며, 바라문 문화의 제2기다.

사람들은 크고 작은 인간의 문제를 신에게 고하거나 빌기 위해 의례를 행하고 제사를 드렸다. 이러한 의례 또는 제사의 형식이 처음에는 간단하였고 그 목적도 단순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것은 점점 복잡하고 정교하게 되어 많은 제단과 제사를 관장하는 여러 사제자들이 필요하게 되었을 것 또한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변화에 비추어 볼 때 의례와 제사는 이제 우주와 신들을 움직일 수 있는 신비한 힘을 가지는 일종의 성스러운 기술로 간주되었다. 리그베다 외에 사마베다, 야주르베다, 아타르바베다는 신에 대한 권청 또는 제사의식의 축문 및 주문집으로서 브라흐마나 시대에 성립된 것들이다. 신을 움직이게 하는 제사의 전담자는 큰 권능을 갖게 되었으며 이들은 제사에 관한 권능뿐 아니라 사회적 지위 또한 향상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사제가 세상을 지배하는 사제 지상주의사회를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브라흐마나 시대에서는 베다 시대의 자연신교적 종교사상이 더욱 발전되어 범신론적(汎神論的) 우주론이 나타나고 있다. 즉 우주를 창조한 인격신으로서 브라흐만이 상정되어 그가 우주 자연 등 일체를 성립시킨 다음 스스로 그 일체 속으로 들어갔다고 생각하였다. 그런 뜻에서 브라흐만은 우주를 창조한 인격신인 동시에 우주의 본질이기도 한 셈이다. 이같은 일원론적 범신론의 견지에서 사제자들은 그들 스스로를 브라흐만과 직결된 종성이라고 주장하였다.

사제자들이 브라흐만과 직결된 종성임을 주장하며 바라문 중심주의, 제사 지상주의에 빠져 있을 때 이런 현실에 회의를 느껴 새로운 의식을 갖는 사람들이 나오게 된다. 우빠니샤드 시대의 사상가들이 바로 그들이다. 의례와 제사를 만능으로 삼는 지나친 종교적 색채가 반성이 되고 철학적 사색이 심화된 이 시기는 기원전 800년에서 600년 경으로 바라문 문화의 제3기이다.

이 시대의 문헌은 새로운 의식을 지닌 사상가들이 숲 속에서 비밀스러운 뜻을 노래한 내용의 아란야까와 그 중에서도 특히 철학적 사색이 더욱 체계화된 우빠니샤드가 있다. 우빠니샤드는 ‘가까이 앉는다’는 의미에서 나온 말이다. 스승과 제자가 가까이 앉아 서로 은밀하게 주고받은 가르침을 모아 이룩한 성전이라는 뜻이다.

이 우빠니샤드 시대에서는 제사보다 지식을 더욱 고차원적인 해탈의 열쇠로 간주하였다. 의례와 제사 대신에 사색을 통한 지적 추구가 더욱 중시된 것이다. 따라서 우빠니샤드 시대의 사상가들은 우주의 질서와 그 이면의 통일성에 관해서 사색하였고 절대적 존재와 개체적 자아의 한계에 대하여 탐구하였다. 그리하여 브라흐마나시대의 일원론적인 범신론은 이 시대에 이르러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우빠니샤드는 세계의 다양성의 배후, 즉 모든 신들과 피조물들, 인간과 자연의 이면에 하나의 절대적 동일성인 최고의 브라흐만이 존재한다는 사상을 펼치고 있다. 브라흐만은 전우주이며,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우주안에 있는 모든 것이라고 일컬어진다. 이렇게 브라흐만을 우주와 동일시함으로써 우빠니샤드는 모든 것 안에서 브라흐만을 보고 브라흐만 안에서 모든 것을 본다. 인도인들은 모든 자연의 사물들 안에 브라흐만의 내재성을 인정하는 한편 동시에 창조된 세계를 뛰어넘는 브라흐만의 초월성에 대해서도 성찰했다. 브라흐만은 세계 전체를 포괄하되 세계를 휠씬 초월하며, 또 그 자신의 일부분으로서 온 우주에 편재해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처럼 우주에 있어서 절대적 통일성의 원리가 통찰되는 가운데 그것은 인간 존재의 동일성으로 파악되기도 하였다. 즉 우주의 근원인 동시에 보편적 원리로서의 ‘브라흐만(梵)’과 인간 내면의 핵심인 ‘아뜨만(Atman, 我)’은 동일한 존재라는 우빠니샤드의 범아일여(梵我一如)사상이 곧 그것이다. 아뜨만은 ‘호흡하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말이다. 그것이 점차 생기(生氣), 신체를 의미하게 되고 나아가 자아, 영혼을 의미하는 말로 발전하였다.

우빠니샤드에 있어서 자기 본질인 아뜨만은 동시에 우주 그 자체의 본질이다. 아뜨만은 만물에 내재하여 우주의 모든 존재를 지탱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우주의 근본이며 보편적 원리인 브라흐만과 다른 것이 아니다. 이것이 범아일여의 기본적 의미이다. 우빠니샤드 사상가들은 이같은 보편적 자아와 개체적 자아가 동일하다는 존재의 통일성을 체득하기 위해 스승의 지도 아래 학습하거나 성찰하고 명상, 요가 등의 수련을 병행하기도 하였다.



혁신적인 사문들의 사상

바라문에 대하여 새로운 정신적 지도자로서 등장한 것이 사문이다. 사문(samana, 沙門)이란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정도의 뜻으로 초기 우파니샤드에서는 단 한번 사용된 말이지만 이 시대 이후의 여러 문천에서는 매우 빈번하게 사용되며 일반적인 자유사상가의 총칭으로 쓰여지고 있다. 그들은 바라문과는 달리 예로부터 내려오던 계급제도를 무시하여 어떠한 계급도 사문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또 모든 베다 성전의 권위를 부정하는 등 바라문교에 대하여 비판적이었다. 언어적으로도 바라문의 용어인 산스크리트어를 사용하지 않고 일반 민중의 말에 근거한 프라크리트어(俗語)를 사용하였다. 그들은 바라문교에서 규정한 네 가지 생활단계에 따르지 않았다. 네 가지 생활단계란 스승 밑에서 학습하는 청년 시절의 범행기(梵行期), 가정에서 생활하며 가장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가주기(家住期), 가정과 재산을 아들에서 물려주고 숲 속에 들어가 은거하는 임서기(林捿期), 숲 속의 거처까지 버리고 완전히 무소유로 걸식하고 편력하는 생활에 들어가는 유행기(遊行期)를 말한다. 사문들은 이런 규정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시기에 출가하여 한 곳에 머물지 않는 유행생활에 들어가 여러 가지 수행을 하면서 사람들에서 새로운 가르침을 설하였다. 바라문을 정통 사상가라고 한다면 사문은 이단적인 사상가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사문의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인 것은 주로 신흥도시의 사람들이었다. 도시의 새로운 분위기에 젖은 사람들은 바라문에 대해서 종전처럼 반드시 추종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사문이 설하는 바에 공감하였다. 특히 국왕이나 자산가오 같은 새로운 실력자들은 모드 사문들을 존경하고 지지하였다. 이렇게 갠지스강 중류지방에는 각각 자유로이 출가유행하고 자유로운 사상활동을 실행하는 사문들이 나타나기에 이르렀다.

당시 바라문이나 사문들이 가지고 있던 사상은 매우 다양하였는데 그들의 견해를 분류하여 불교에서는 62견(見)으로 자이나교에서는 363견(見)으로 정리하고 있다. 이것은 불교나 자이나교의 입장에서 각각 이단적 견해라고 생각되는 것을 열거한 것이다. 다만 이러한 분류방법은 기계적으로 조합된 것도 포함하고 있어 이것을 바로 당시 사상계의 실태라고는 볼 수 없다. 이것을 통해 당시 사상계에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불교의 62견에 대한 설명을 살펴보면 이것들은 크게 과거에 관한 견해(18가지)와 미래에 관한 견해(44가지)로 나누어진다. 여기서 과거라고 하는 것은 전세(前世)의 생존을 가리키고 미래라고 하는 것은 사후의 생존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에, 62견은 모두 윤회전생의 사상을 배경으로 한 교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은 그 행위에 의해 윤회의 생존을 되풀이한다는 사상은 이미 초기 우파니샤드 시대에서부터 점차 성숙되어 온 관념인데, 이 시대에 이르러 바라문과 사문을 포함한 모든 사상계 일반에 널리 유포되어 정착하게 되었다. 윤회의 생존을 인정한다면 윤회하는 중심적 존재가 문제되기 때문에 윤회의 주체로서 아트만과 그 생존의 장소로서 세계에 대한 여러 가지 다양한 견해가 모색되었다. 또한 윤회의 생존으로부터 벗어난 해탈, 열반의 경지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문제가 제기되었다. 나아가 이러한 윤회나 해탈의 사상을 완전히 부정하는 학설도 나타났으며 모든 사물에 대해 회의적 궤변을 늘어놓는 학설도 출현하였다. 이러한 다양한 견해를 분류한 것이 62견인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다양한 사상의 내용이나 그 주장자에 관해서는 거의 밝혀져 있지 않다. 다만 사문들 가운데 몇 사람의 이름과 그들의 사상이 불교의 초기 경전에 속하는 사문과경(沙門果經) 등에 나타나 있다. 이른바 육사외도설(六師外道說)이 그것이다. 여기서 외도설이란 불교와는 다른 길의 사상이라는 뜻으로 쓰인 말이다. 육사(六師)의 견해를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번째 육사외도 가운데 제일 먼저 언급되고 있는 푸라나 캇사파는 도덕 부정론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살생, 도둑질, 간음, 거짓말 등을 해도 악을 행한다고 할 수 없으며 악의 과보도 생기지 않는다. 또 제사, 보시, 극기, 진실한 말 등을 행하여도 선을 행한다고 할 수 없으며 선의 과보도 생기지 않는다고 주장하여 당시 일반 세간에서 인정되고 있던 선악의 행위와 그 행위가 미래에 초래하는 과보를 모두 부정하였다.



두번째 막칼리 고살라는 숙명론자였다. 그에 따르면 윤회의 생존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 혹은 청정하게 되고 해탈하는 것, 그 모두는 원인이 없다. 살아가는데는 지배력도 의지력도 없으며 다만 자연의 정해진 상황과본성에 의해 결정될 뿐이라고 하였다. 그는 인간의 의지에 근거한 행위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업에 의한 윤회전생을 부정하는 등 일종의 결정론적인 숙명론을 주장하였다. 그는 윤회의 주체로서 영혼(jiva, 命我)을 인정하고는 있지만 이것을 상주하는 물질적 존재라고 생각하여 지(地), 수(水), 화(火), 풍(風), 허공(虛空) 등의 원소와 같은 원리로서 파악하였다. 또 득(得), 실(失), 고(苦), 락(樂), 생(生), 사(死), 영혼(靈魂)의 추상관념을 하나의 원리로서 상정하고 이것들을 실체로 보려고 하였다.



세번째 아지타 케사캄바린은 인도에서 가장 알려진 가장 오래된 유몰론자이다. 그는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의 네 가지 물질적 원소만이 참된 실재라 하여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였다. 인간은 죽음으로써 단멸하고 신체는 모두 네 가지 원소로 환원된다. 내세와 같은 것은 있을 수 없고 현세가 인생의 전부이며, 선악의 행위를 짓더라고 죽은 후 그 과보를 받는 일이 없다고 하였다. 그는 감각적 유물론 내지는 쾌락주의의 입장에 섰던 것으로 보여진다.



네번째 파쿠다 캇차야나는 유물론적인 경향을 가진 사상가이다. 그는 지(地), 수(水), 화(火), 풍(風) 네 가지 원소 이외에 고(苦), 락(樂), 영혼(命我) 등 세 가지 원소를 더하여 일곱 가지 요소의 실재를 주장하였다. 영혼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본다면 그의 사상은 아지타와는 다른 이원론의 입장처럼 보이지만 파쿠다가 인정하는 영혼은 물질적인 것으로 지극히 유물론적이다. 7요소는 독립적인 것으로 불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테면 사람을 죽여도 다만 날카로운 칼날이 7요소 사이를 관통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는 파쿠다 역시 실천적으로 도덕을 부정하는 입장에 섰다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



다섯번째 산자야 벨라티풋타는 대표적인 회의론자이다. 그는 이를 테면 내세는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하여 그렇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렇다고도, 그것과 다르다고도, 그렇지 않다고도, 그렇지 않은 것도 아니라고도 생각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즉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하여 애매한 대답을 하여 판단을 중지한 것이다. 그의 주장은 뱀장어처럼 미끈미끈하여 좀처럼 붙잡을 수 없는 교설로 일컬어진다.



여섯번째 니간타 나타풋타는 자이나교의 개조 마하비라를 불교도들이 부르는 이름이다. 니간타(Nigantha)라고 하는 것은 그 이전에 존재하였던 종교적 단체의 명칭이며 나타풋타는 나타족 출신의 사람이란 뜻이다. 본명은 밧다마나(Vaddhamana)인데 크게 깨쳤으므로 마하비라(Mahavira, 위대한 영웅) 혹은 지나(jina, 수행을 완성한 자)로 존칭되고 있다. 그의 가르침과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을 일반적으로 자이나라고 부른다. 자이나교는 여러 가지 면에서 불교와 유사하고 가깝지만 사상적으로는 매우 다르다. 마하비라는 석존과는 달리 자연세계나 물질에 대한 관찰에 관심을 나타내 매우 색다른 형이상학적 고찰을 모색하였다. 우주는 많은 요소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것들을 크게 영혼(jiva, 命我)과 비영혼(ajiva, 非命我)으로 나눌 수 있다고 하였다. 영혼은 우파니샤드의 아트만처럼 상주편재(常住遍在)하는 자아가 아니라 다수의 실체적 개아(個我)로서 지수화풍(地水火風)의 네 가지 원소나 동물 식물에도 내재되어 있다. 비영혼은 담마(dhamma, 法/운동의 조건), 아담마(adhamma, 非法/정지의 조건), 허공, 물질 등 네 가지고 이루어져 있으며 이것과 영혼을 합해 다섯 가지 실재체(實在體)라고 한다. 이 다섯 가지 실재체는 모두 점(點, 공간)이 집합하여 이루어진 실체이며, 세계의 구성은 이것에 의해 통일적으로 설명된다.



마하비라는 윤회와 해탈의 문제에 대해서도 독자적인 교설을 세우고 있다. 그는 업을 미세한 물질로 보고 이 업이 외부로부터 신체 내부의 영혼에 유입되고 부착하여 영혼을 속박하기 때문에 윤회의 생존이 되풀이된다고 생각하였다. 마하비라가 업을 물질로 간주한 것은 석존의 교설과 크게 다른 점이다. 이러한 업에 의해 속박된 윤회에서 벗어나 영혼이 그 본성을 발현하여 해탈하기 위해서는 미세한 업물질이 영혼에 유입하는 것을 제어하고 이미 영혼에 부착된 업물질을 멸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계율을 지키고 고행을 실천하는 것이 필요한데 그것은 출가수행에 의해 가능하다고 보았다.



2) 근본교설

근본교설은 붓다가 직접 가르친 것으로, 또한 붓다의 제자들이 그들의 스승으로부터 받은 가르침을 자신들의 제자들에게 그대로 전한 것이다. 아직 교단이 분열되기 전이었으므로 붓다의 가르침은 다른 주장없이 그대로 그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근본교설에서는 형이상학설을 배제하고 세계와 인생의 현상적 존재에 대해서만 매우 합리적인 고찰을 하였다.

초기경전에 나오는 여러 교리 가운데서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연기설(緣起說)이며, 연기설의 응용 내지 실천 이론들인 12연기, 사성제(四聖諦), 삼법인(三法印), 윤회와 업 등이라고 할 수 있다.



연기설(緣起說)

석존의 깨달음을 설한 경전의 기술에는 몇 가지 유형이 있는데, 내용적으로 보면 결국 연기(緣起)의 자각이 그 중심이 된다고 볼 수 있다. 기록에 의하면 석존은 보리수 아래에서 연기를 관찰함으로써 깨달음을 얻어 불타(佛陀)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근본 교설들은 모두 연기설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되는 것이며 연기의 의미를 아는 것이 근본불교의 사상 그 자체를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연기사상은 근본불교에서 뿐만 아니라 초기대승, 중기대승에 있어서도 항상 불교의 중심문제가 되었으며 나아가 후기대승은 물론 중국, 한국, 일본에서 발전한 불교에서도 각각의 입장에서 끊임없이 고찰되고 있다.

연기(緣起, pratitya-samutpada)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을 緣하여 일어나는 것’이라고 하는 의미로 일체의 사물은 다양한 원인과 조건으로 인해 성립한다고 하는 말이다. 인간 존재나 그것을 둘러싼 세계는 모두 어떤 원인과 조건에 근거하여 성립하는 것이다.

근본불교에 있어서 연기의 일반적인 정의로서는 보통 다음과 같은 하나의 글귀를 들 수 있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면 저것이 일어난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이것이 소멸하면 저것이 소멸한다.’ 어떤 것을 緣하여 일어난다고 하는 것은 다른 것과 서로 관계하여 존재한다는 것으로 그 자체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상주불변(常住不變)것은 더욱 아니라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그것을 형성시키는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만 그리고 상호관계에 의해서만 존재하기도 하고 소멸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결국 연기설이란 존재의 관계성을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어떤 것이 다른 것의 원인이 되고 다른 것이 어떤 것의 결과가 된다고 하는 관계는 일반적으로 넓은 의미로 이해되고 있다. 앞에서 인용한 연기의 정의를 나타낸 귀절 중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면 저것이 일어난다’고 하는 원만은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날 때 저것이 일어난다’고도 번역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연기의 관계는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면 저것이 얼어난다’고 하는 무시간적, 논리적 관계와 함께 시간적, 생기적(生起的) 관계가 고려되는 것이다.

연기설은 세계 인생의 일반적인 생멸 변화를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연기가 말하여진 본래의 목적은 단순한 일반적 현상보다도 오히려 인간의 고뇌가 어떠한 조건과 원인에 의해 생겨나고 어떠한 인연 조건에 의해 사라지는가 하는 인생의 고락운명에 관한 것을 밝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연기설이 문제되는 현상은 단순한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 선악업과 그 과보로서의 고락과 같은 윤리 종교적인 가치관계의 현상이다. 연기의 인과관계에는 과거세로부터 현재, 미래세에 이르는 선인선과, 악인악과의 인과업보의 사상도 포함되어 있다. 근본불교에서는 연기에 의한 현상간의 관계방식에 대해 상세한 고찰은 하지 않았으나 후세의 불교에서는 그에 대한 여러 각도에서의 고찰이 행해져 왔다. 불교의 근본주장은 크게 연기설로 일관된 것으로 시대의 변천에 따라 그 고찰의 각도가 달라진 것으로 볼 수 있다. 후세의 불교에서는 연기설을 협의로만 이해하여 연기라고 하는 것은 시간적 선후가 있는 인과 관계에만 존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시간에 관계없는 논리적인 연기관계에 대해서는 그것을 연기라고 부르지 않고 실상(實相)이라고 하는 이름으로 불렀다. 따라서 후세의 불교에서는 연기론과 실상론이 대립하여 양자는 별개의 교학 계통에 속하는 것으로 되어졌다.



십이연기(十二緣起)

연기란 일체 존재의 근원에 대한 보편적인 법칙이지만, 석존에 의해 자각된 이러한 연기설이 당시 인도 사상계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불전(佛傳)에 의하면 석존은 출가한 후 당시 문화의 중심지였던 마가다국의 수도 라자가하 근교에 있던 알라라 카라마(Alara Kalama)와 웃다카 라마풋타(Uddaka Ramaputta) 밑에서 선정을 하였지만 여기에 만족할 수 없었다. 석존은 다시 우루벨라의 세나 마을의 고행림(苦行林)에 들어가 모든 고행을 다하였지만 이것에 의해서도 깨달음을 얻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네란자가 강물에서 몸을 깨끗이 씻고 마을 처녀 수자타가 바친 우유죽을 먹고 몸과 마음을 회복한 후, 이윽고 보리수 밑에서 스스로 선정에 들어 정각을 얻어 불타가 되었던 것이다. 그때 석존이 정각을 얻는데 아무런 쓸모가 없다고 버렸던 당시 철학이나 종교는 크게 바라문계와 육사외도 등으로 대표되는 사문계의 사상으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베다와 우파니샤드에 근거한 인도 정통파의 입장에 속하는 것으로 유일의 원리인 브라흐만으로부터 전 세계가 생겨났다고 하는 점이 사상적 특징이라 할 수 있으며 보통 전변설(轉變說)이라고 한다. 바라문계 사상에서 있어서는 전 세계가 어떻게 성립하였는가 하는 문제를 고찰할 때 먼저 브라흐만이라고 하는 근본원리를 세우고 이러한 근본원리인 브라흐만이 자기자신을 전개시켜 전 세계를 성립시킨다고 주장한다. ‘일체는 브라흐만이다’라는 주장은 우파니샤드에서 자주 설해지는데 이러한 근본원리로서의 브라흐만은 개인 가운데 내재되어 있는 아트만과 동일시되고 점차 정신적 원리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띠게 된다. 그러므로 전변설은 절대 유일의 정신적 원리가 전개하여 인간과 그것을 둘러싼 세계가 성립된다고 설하는 주장이다.

이 시대에는 종래의 바라문계 사상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 자유사상사들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육사외도라고 불리던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는데, 이들 자유사상가들이 주장한 사상의 특징은 유일의 원리로부터 복잡한 현상세계가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많은 독립된 원리와 요소가 어떠한 형태로서 결합하여 이 세계가 구성된다고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육사외도라 불려지는 사문들 가운데 아지타 케사캄바린은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의 네 가지 원소를 주장한다. 즉 인간은 이들 네 가지 원소로 구성되어 있으며 신체가 소멸함과 동시에 모든 원소도 각각 분해한다고 설하였다. 파쿠다 캇차야나느 7요설을 인정하였고, 막칼리 고살라는 살아있는 것을 구성하는 요소로 12가지 원리를 주장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여러 가지 구성요소가 결합하여 인간 및 세계가 성립한다고 하는 주장을 초기경전에서는 적집설(積集說) 또는 적취설(積聚說)이라고 한다. 이 적취설은 바라문계의 전변설에 비해 유물론적 색채가 강하며, 업이나 인과응보의 이치를 부정하는 경향을 띠고 있다.

그런데 불교에 있어서의 연기는 보편적인 법칙성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단순히 철학설로서 논의되기 의한 것은 아니며 지금 여기서 인생의 괴로움에 번민하고 있는 인간의 문제로 설해진 것이다. 연기는 ‘무엇을 緣하여 일어난 것’이라고 하는 뜻이지만 무엇인가를 연하여 일어났다고 하는 존재의 성립을 설할 뿐만 아니라 무엇인가를 연하여 일어나고 있는 현실적 괴로움에 얽매인 인간 존재를 문제삼고 있는 것이며 현실의 존재는 무엇인가를 연하여 일어났다. 다시 말해 연기된 것이라고 함으로써 그것을 바로 무상(無常)이고 고(苦)이며 무아(無我)라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바라문계의 전변설이나 사문들의 적취설에 비해 연기의 입장은 세계관적인 면에서 양자를 초월한 보다 높은 입장, 종교적 면에서 볼 때 깊은 실천적인 입장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초기경전에 있어서 연기는 항상 인간의 미혹과 깨달음을 문제로 설해지는데 보통 십이연기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십이연기는 12가지 지분(支分)을 갖춘 형태로서 십이인연(十二因緣), 십이지연기(十二支緣起)라고도 한다.

십이연기란 무명(無明), 행(行), 식(識), 명색(名色), 육입(六入), 촉(觸), 수(受), 애(愛), 취(取), 유(有), 생(生), 노사(老死)이다. 12연기로써 때로는 생멸 변화하는 세계와 인생의 모든 현상을 설명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이 교리의 근본 목적은 인생의 근원적인 문제인 고(苦)가 어떻게 해서 생겨나고, 또 어떻게 해서 사라지는가를 밝히는 것이다.

12연기를 관찰하는 방법에는 순관(順觀)과 역관(逆觀)이 있다. 순관이란 무명을 조건으로 해서 행이 있고, 행을 조건으로 해서 식이 있고, 식을 조건으로 해서 명색이 있다. 계속해서 육입, 촉, 수, 애, 취, 유, 생, 노사가 있다라고 관찰하는 것이다. 즉 순관은 고(苦)의 발생과정을 설명하는 방법이다. 이렇게 보는 연기를 역시 유전(流轉) 연기라고도 부른다. 그것은 존재가 무명과 욕망 등으로 말미암아 윤회의 세계에서 생사를 되풀이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연기이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역관이란 고(苦)가 소멸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방법이다. 무명이 소멸하기 때문에 식이 소멸하고, 식이 소멸하기 때문에 명색이 소멸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노사의 소멸까지를 설명한다. 이렇게 보는 연기를 역시 환멸(還滅) 연기라고도 한다. 그것은 존재가 무명과 욕망을 없앰으로써 생사유전(生死流轉)의 세계에서 벗어나 열반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설명하는 연기이기 때문이다.

십이연기는 훗날 다양하게 해석되는데 여기서는 十二支 각각의 의미를 주로 경전 자체의 설명에 근거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무명(無明, avida)이란 글자 그대로 명(明, 지혜)이 없다는 말이다. 올바른 법, 즉 진리에 대한 무지를 가리킨다. 구체적으로는 연기의 이치에 대한 무지이고 사성제(四聖諦)에 대한 무지이다. 고(苦)는 진리에 대한 무지 때문에 생기므로 무명은 모든 고를 일으키는 근본 원인이다. 무명을 조건으로 해서 행(行, samskara)이 있다.



행이란 행위, 즉 업(業, karman)을 가리킨다. 행에는 몸으로 짓는 신행(身行)과 언어로 짓는 구행(口行)과 마음으로 짓는 의행(意行)이 있다. 행은 진리에 대한 무지, 즉 무명 때문에 짓게 되고 그것을 지운 존재의 내부에 반드시 잠재적인 힘의 형태로 남게 된다. 행을 조건으로 해서 식(識, vijnana)이 있다.



식은 인식작용으로서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 등 6식이다. 식이란 표면적인 의식뿐 아니라 잠재의식도 포함한다. 꽃을 볼 경우 꽃이라는 인식이 일어나게 되는 것은 전에 꽃을 본 경험이 잠재의식 상태로 남아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꽃을 보았다는 과거의 경험은 과거의 행위이다. 따라서 과거의 행이 없다면 현재의 인식작용이 일어날 수 없다. 그래서 행을 조건으로 해서 식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식을 조건으로 해서 명색(名色,namarupa)이 있다.



명(名, nama)이란 정신적인 것을 그리고 색(色, rupa)이란 물질적인 것을 가리킨다. 식이 주관적인 면을 나타내고 있는 데 반해 명색은그 대상인 객관적인 면을 나타내는 것이다. 명색을 조건으로 해서 육입(六入 또는 六處, sadayatana)이 있다.



육입이란 눈[眼], 귀[耳], 코[鼻], 혀[舌], 몸[身], 마음[心]의 6가지 감각기관, 즉 육근(六根)이다. 이는 대상과 감각기관과의 대응작용이 이루어지는 영역을 말한다. 육입을 조건으로 해서 촉(觸, sparsa)이 있다.



촉이란 지각을 일으키는 일종의 심적인 힘이다. 촉(觸)에도 눈, 귀, 코, 혀, 몸, 마음 등 6가지의 감각기관에 의한 육촉(六觸)이 있다. 촉은 육입에 의해서 생긴다고 되어 있지만 엄밀하게 말한다면 육입만에 의해서가 아니고 식(識), 명색(境), 육입(根) 등 3요소가 함께 함으로써 발생하게 된다. 촉을 조건으로 해서 수(受, vedana)가 있다.



수란 즐거운 감정, 괴로운 감정, 즐거움도 괴로움도 아닌 감정과 그 감수(感受)작용을 말한다. 감각기관과 그 대상 그리고 인식작용 등의 3요소가 만날 때 거기에서 지각을 일으키는 심적인 힘이 생기게 되고 그 다음 수가 발생하게 된다. 그러므로 수는 촉을 조건으로 해서 있다고 하는 것이다. 수를 조건으로 해서 애(愛, trsna)가 있다.



애란 갈애(渴愛)라고 하는데 보통 목이 타서 갈증이 나면 오로지 물을 구하기에 그치지 않는 것처럼 항상 능동적으로 만족을 구하는 인간의 본능적, 맹목적, 충동적 욕망을 말한다.

애를 조건으로 해서 취(取, upadana)가 있다. 취는 집착의 의미로서 인간의 미혹한 생존은 집착에 근거한 것이다. 맹목적인 애증에서 발생하는 강렬한 애착을 가리킨다. 어떤 대상에 대해 욕망이 생기면 뒤따라 그것에 집착심을 일으키게 된다. 그래서 애를 조건으로 해서 취가 있다라고 하는 것이다. 취를 조건으로 해서 유(有, bhava)가 있다.



유(有)란 존재를 말한다. 초기경전에서는 취를 조건으로 해서 어떻게 존재가 있게 되는가를 설명해 놓은 곳을 찾기 어렵다. 업설에 의하면 집착 때문에 업이 만들어지고 업은 생(生)을 있게 하는 조건이 된다. 따라서 유(有)를 업이라고 본다면 취(取)를 조건으로 해서 유가 있다라는 말은 집착을 조건으로 해서 업이 있다라는 것이 된다. 두번째 항목인 행을 무명으로 인해 생기는 소극적인 업이라고 한다면 유는 애와 취를 조건으로 해서 생기는 적극적인 업이라고 할 수 있다. 유를 조건으로 해서 생(生, jati)이 있다. 업은 생을 있게 하는 원인이기 때문에 유에 의해서 생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생을 조건으로 해서 늙음과 죽음(老死, jara-marana) 등 여러 가지 고가 있다. 생이 있게 되면 필연적으로 늙음과 죽음이 있게 된다. 그리고 다른 여러 가지 고(苦) 즉 근심, 비애, 고통, 번뇌, 번민이 발생하는 것이다.



삼법인(三法印)

법인(法印)이란 법의 표식(標識)이라는 말이다. 삼법인은 불교의 특징을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불교의 깃발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것은 불교를 다른 종교나 사상과 구별하기 위한 하나의 기준이 된다. 삼법인은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일체개고(一切皆苦)의 형식으로 나누기도 하지만 무상과 무아의 개념 속에 고(苦)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일체개고 대신에 열반적정(涅槃寂靜)을 넣어서 제행무상, 제법무상, 열반적정의 형식을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제행무상인(諸行無常印)

제행(諸行)이란 일체의 만들어진 것 다시 말하면 물질적 정신적인 모든 현상을 가리킨다. 무상(無常)은 anita 를 번역한 말로써 항상함이 없다. 변화하고 변천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제행무상이란 모든 존재는 항상함이 없이 변화하는 것이다라는 의미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바뀌고 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산이나 바위 같은 것은 외견상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우리가 지각하지 못하는 것일 뿐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있다. 존재란 여러 요소들이 여러 가지 조건에 의해 모여있는 집합체에 불과하기 때문에 존재를 구성하는 요소와 조건들이 변하거나 사라지는 것이다. 따라서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은 고정불변적인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존재도 무상한 것일 수 밖에 없다.



제법무아인(諸法無我印)

제법(諸法)은 모든 존재를 의미하고, 무아(無我)라는 말은 아(我)가 없다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말하는 아란 생멸변화를 벗어난 영원하고 불변적인 존재인 실체 또는 본체를 말한다. 따라서 제법무아는 모든 존재에는 고정불변하는 실체적인 아가 없다라는 의미이다. 모든 존재는 비실체적인 여러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서 시시각각으로 변하면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속에 고정불변한 실체적인 아가 없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제법무아라고 해서 현상적인 존재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부정하고 있는 것은 단지 고정 불변하는 실체적인 아(我)뿐이다.

무아(無我)이론의 특징은 모든 것에는 고정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고정성이 없는 것을 무자성(無自性)이라고도 한다. 자성(自性)이라고 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 독립된 형이상적 존재를 가리키는 것이다. 고정불변한 형이상학적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근본불교의 기본적 이론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무아임을 꿰뚫어 보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근본불교에서는 고정불변적인 존재로서의 아(我) 대신에 존재라는 것의 전체로서 오온(五蘊)을 들고 있다.

온(蘊, khandha)이라고 하는 것은 ‘모임’을 의미하므로 ‘오온’이라고 하는 것은 다섯 개의 요소가 모인 것이라는 뜻이다. 색(色, rupa)은 물질로서의 육체를 가리킨다. 육체는 4가지 기본요소인 사대(四大)와 사대에서 파생된 물질인 사대소조색(四大所造色)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대란 지, 수, 화, 풍으로 지(地)는 뼈, 손톱, 머리카락 등 육체의 딱딱한 부분이고, 수(水)는 침, 혈액, 오줌 등 액체부분이다. 화(火)는 체온이고, 풍(風)은 몸속의 기체 즉 위장 속의 가스같은 것을 가리킨다. 사대소조색이란 사대로 이루어진 다섯 가지의 감각기관인 눈, 코, 귀, 혀, 몸 등이다. 수(受, vedana)는 괴로움과 슬픔 등의 감수작용이다. 수는 내적인 감각기관과 그것에 상응하는 외적인 대상들과의 만남에서 생긴다. 수에는 성질상 세 가지가 있다. 즉 고수(苦受), 낙수(樂受),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이다. 고수란 즐거운 감정이고, 낙수란 괴로운 감정이고, 불고불락수란 사수(捨受)라고도 하는 것으로서 괴로움도 즐거움도 아닌 감정을 가리킨다. 상(想, sanna)은 개념표상의 취상작용(取象作用) 또는 심상(心象)이다. 상 역시 감각기관들과 그것에 해당되는 대상들과의 만남에서 생긴다. 상은 대상들을 식별하고 그 대상들에게 이름을 부여한다. 행(行, sankhara)은 의지작용 및 그 밖의 정신작용이다. 인간이 동물과 달리 윤리생활을 할 수 있고 업을 짓게 되는 것은 이 행의 작용이 있기 때문이다. 넓은 의미로서의 행은 수, 상, 식을 제외한 모든 정신작용과 현상이다. 식(識, vinnana)이라는 것은 인식 판단의 의식작용을 의미한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식의 영역은 대상을 인식하는 데까지 가지 않는다. 그 전 단계인 주의 작용일 뿐이다.

오온의 이론은 인간 존재란 색, 수, 상, 행, 식 등 다섯 가지 요소가 어떤 원인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잡아함경에서는 이것을 “마치 여러 가지 재목을 한 데 모아 세상에서 수레라 일컫는 것처럼 모든 온이 모인 것을 거짓으로 존재라고 부른다”라고 비유로써 설명하고 있다. 수레는 바퀴, 차체, 축 등 여러 요서가 모였을 때 비로소 존재할 수 있는 것일 뿐 이 요소들과 관계없이 홀로 존재할 수는 없다. 인간 존재도 마찬가지로 색 수 상 행 식 등 다섯 가지 요소가 모일 대 비로소 인간이라는 존재도 성립할 수 있게 된다. 오온 이론에 의하면 이 다섯 가지 요소를 제외한 영혼과같은 것을 인정할 수 없다. 수, 상, 행, 식과 같은 정신현상은 영혼과 같은 존재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감각기관과 그 기관에 관계되는 대상과의 만남에서 생기게 되는 것이다. 즉 여섯 가지 감각기관[六根]과 그것에 관계하는 여섯 가지 대상[六境]이 합칠 때 여섯 가지 식[六識]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오온 이론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 존재란 5개의 요소로 이루어져 있고 이 각 요소들은 모두 비실체적인 것이므로 이와 같은 요소들로 이루어진 인간 존재 역시 비실체적이라는 것이다. 거기에는 고정불변적이거나 초월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열반적정인(涅槃寂靜印)

열반(nirvana)이라고 하는 것은 ‘불어서 끄다’라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탐욕, 분노, 어리석음 등 번뇌의 불을 끈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초기경전에서는 열반을 “탐욕의 사라짐, 분노의 사라짐, 어리석음의 사라짐, 이것을 이름하여 열반이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초기경전에 의하면 당시의 열반설에서는 색계정(色界定)이나 무색계정(無色界定) 등의 여러 가지 선정의 상태를 이상적인 열반이라고 간주하거나 또는 다섯 가지 감각기관의 욕락에 빠지는 세속적인 쾌락이 열반이라고 하는 주장이 있었던 듯하다. 석존이 수행시절에 가르침을 받은 두 선인(仙人)은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定)이라고 하는 뛰어난 무색계정이 열반의 이상이라고 하였는데 석존은 곧바로 그들과 동일한 선정에 들어갈 수 있었어도 여전히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뛰어난 무색계정도실제로는 이상적인 열반으로 간주될 수 없다고 여기고 이 두 스승으로부터 떠났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6년간의 고행후에 열반은 신체를 혹사하여 고통스럽게 하는 고행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체험하였기 대문에 이 고행도 포기하였다. 그리고 고행이나 욕락과 같이 극단으로 치닫는 것이 아닌 중용적인 생활과 심신상태 아래에서 세계 인생의 진리를 깨달음으로써 비로소 열반의 경지에 도달하여 불타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열반은 단순한 고행이나 선정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세계와 인생의 진리에 관한 올바른 지혜를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열반의 상태는 고요하고 괴로움이 없이 편안한 것으로, 이를 적정(寂靜)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경전에서 열반이란 말을 멸(滅), 적(寂), 불사(不死), 최상의 안락 등 여러 가지로 번역하고 있다. 이것을 현대적으로 표현하면 최상의 행복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열반은 불교에서 추구하는 궁극적 목적이자 최고의 이상이다. 불교의 모든 가르침은 결국 이 열반을 얻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열반적정인은 불교의 이상관이라고 할 수 있다.



사성제(四聖諦)

사성제에서 제(諦, satya)란 진리 또는 진실을 의미한다. 따라서 사성제란 네 가지의 성스러운 진리라는 말이다. 이것은 고(苦)성제, 집(集)성제, 멸(滅)성제, 도(道)성제를 가리키는 것으로 간단하게 고집멸도라고도 한다. 사성제를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고와 고의 원인 그리고 고의 소멸과 고의 소멸에 이르는 것이다.

사성제는 불교의 모든 교리 가운데서 가장 처음으로 설한 것이다. 붓다가 녹야원에서 다섯 명의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벌을 설했을 때로부터 시작해서 쿠쉬나가라에서 반열반(般涅槃)에 들 때까지 45년 동안 가장 많이 설한 가르침이 바로 사성제이다.

사성제의 가르침은 불교의 궁극목표인 고(苦)에서의 해탈을 위해 만들어진 가장 구체적이면서도 간단한 교리이다. 붓다는 인생의 괴로움을 해결하기 위해 의사가 병을 치료할 때와 같은 방법을 사용한 것이다.



고성제(苦聖諦)

불교에서 말하는 고(苦)란 무엇인가. 고라는 말인 duhkha를 일반적으로 괴로움, 고통, 슬픔 등으로 번역하고 있지만 실은 이것보다 휠씬 더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신체적, 생리적인 고통 또는 일상적인 불안이나 고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를 현대적인 말로 표현하면 ‘자신이 하고자 하는 대로 되지 않는 것’,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것은 우리의 생존에 따르는 모든 괴로움을 망라한 것이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모든 곳은 고(苦)다’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고를 구체적으로 설명할 때는 사고(四苦) 또는 팔고(八苦)를 말한다. 태어남, 늙음, 병듦, 죽음 등의 네 가지 고(苦)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고[愛別離苦],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는 고[怨憎會苦],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고[求不得苦], 오온의 집착에서 생기는 고[五取蘊苦] 등의 네 가지를 합쳐서 여덟 가지 고(苦)이다.

또한 고를 성질에 따라 고고(苦苦), 괴고(壞苦), 행고(行苦) 등 3종으로 나누기도한다. 고고(苦苦)란 주로 육체적인 고통을 말한다. 보통 고통이라고 하는 것이 이 경우에 해당된다. 괴고(壞苦)란 파괴나 멸망 등에서 느끼는 정신적 고뇌를 말한다. 행고(行苦)란 현상세계가 무상하다는 것을 조건으로 해서 느끼는 고이다.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끊임없이 변하는 현실 앞에서 느끼게 되는 괴로움이다.



집성제(集聖諦)

집(集)이란 samudaya라는 말을 번역한 것으로 불러모으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집성제에서는 고를 일으키는 원인을 밝힌다. 고의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가운데서 가장 근본적인 것은 욕망이다. 다섯 가지 감각기관의 욕망은 물론이고 재산과 권력에 대한 애착이나 사상, 신앙에 대한 집착 등도 욕망이다. 인생의 모든 불행, 싸움, 괴로움은 욕망에서 비롯된다. 욕망의 괴로움의 뿌리인 것이다. 또한 욕망은 인생을 이끌어가는 동력일뿐만 아니라 인생을 지배하는 힘이기도 하다.

이러한 욕망은 구체적으로 욕애(欲愛), 유애(有愛), 무유애(無有愛) 등 세 가지로 나눈다. 욕애란 오욕(五欲) 즉 감각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욕망을 가리킨다. 유애란 존재에 대한 욕망이다. 오래도록 살고 싶다든지 죽은 후에 천상에 태어나서 영원히 살고 싶어하는 등의 욕망이다. 무유애는 무존재(無存在)로 되고자 하는 욕망 즉 사후에 허무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욕망을 가리킨다.



멸성제(滅聖諦)

멸(滅)이란 열반을 번역한 말이다 열반은 소멸의 의미를 가진 말로서 고(苦)가 소멸된 상태를 가리킨다. 고가 완전히 없어진 상태, 다른 말로 표현하면 고에서의 완전한 해방이다. 열반은 불교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이고 이상이다. 열반은 현재의 생에서 성취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열반이 아니다. 열반에 도달한 사람은 괴로움의 원인인 욕망을 다스릴 수 있으므로 욕망 때문에 발생되는 괴로움, 즉 정신적인 괴로움에서는 벗어나지만 아직 육체가 남아있기 때문에 육체적인 괴로움은 피할 수 없다. 그래서 살아있는 동안에 성취하는 열반을 생존의 근원이 남아있는 열반 즉 유여의(有餘依) 열반이라 한다. 여기에서 생존의 근원이란 육체를 말하는 것이다. 유여의 열반을 이룬 사람이 죽으면 다시 육체를 받아 태어나지 않게 된다. 이것을 생존의 근원이 남아있지 않는 열반 즉 무여의(無餘依) 열반이라고 한다. 이 무여의 열반은 완전한 열반으로서 정신적, 육체적인 고가 모두 소멸된 열반이다.



도성제(道聖諦)

도(道)란 열반에 이르는 길이다. 이것은 중도(中道)라고도 부르는 것으로 양극단을 떠난 길이다. 즉 지나치게 쾌락적인 생활도 극단적인 고행생활도 아닌 몸과 마음의 조화를 유지할 수 있는 적당한 상태의 길을 말한다. 열반을 얻기 위한 수행의 길도 극단적인 고행이나 지나친 쾌락을 피하고 중도를 실천해야 한다. 이 중도를 구체적으로 말한 것이 팔정도(八正道)이다. 팔정도(八正道)는 여덟 가지 바른 길로서, 여기에는 정견(正見), 정사(正思),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이 있다. 정견은 바른 견해로서 사성제에 대한 올바른 이해이다. 정사는 바른 생각, 즉 바른 마음가짐이다. 즉 탐욕스러운 생각, 성내는 생각, 해치려는 생각을 가지고 않고 온화한 마음, 자비스러운 마음, 청정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정어는 바른 말이다. 거짓말[妄語], 이간시키는 말[兩說], 욕하는 말[惡口], 꾸며대는 말[綺語]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칭찬하는 말, 성실한 말, 필요한 말을 하는 것이다. 정업은 바른 행위이다. 살생, 도둑질, 음란한 짓을 하지 않고 다른 존재들의 목숨을 구해주고 보시하고 청정한 생활을 하는 것이다. 정명은 바른 생활이다. 정당한 방법으로 의식주를 구하는 것이다. 특히 출가 수행자의 경우에는 재가신도의 바른 신앙에서 우러나는 보시를 받아 생활하는 것이다. 정정진은 바른 노력이다. 이미 생긴 선은 더욱 자라도록 노력하고 아직 생기지 않은 선은 생기도록 노력하고 이미 생긴 악은 끊도록 노력하고 아직 생기지 않은 악은 생기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정념은 바른 기억이다. 자기 자신이나 그 주변의 것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기억해서 반성하고 바른 의식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정정은 바른 정신집중 또는 정신통일이다. 마음을 한 점에 집중하는 것을 말한다. 정(定)을 닦는 구체적인 방법이 선이기 때문에 때로는 이를 선정(禪定)이라고도 한다.



업보윤회(業報輪廻)의 사상

근본 불교사상은 당시 인도사상과 비교할 때 거기에는 불교사상이 인도 일반의 사상과 공통되는 점도 있고, 인도의 다른 사상에서 보이지 않는 불교 특유의 사상을 형성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전자는 직접적으로 시대 환경이 영향을 받아 생겨난 것이고, 후자는 시대 환경을 초월하여 불교라고 하는 새롭고 독자적인 사상을 성립시킨 것이다. 그 가운데 인도 일반사상과 공통된 것으로는 업보윤회(業報輪廻)의 사상과, 수행해탈(修行解脫)의 사상이 있다.

선을 행하면 행복한 결과가 오고 악을 행하면 불행한 결과가 초래된다고 하는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의 업보사상이 인도에서는 불교 이전에 이미 초기 우파니샤드 시대에서부터 확립되어 있었다. 이러한 선인선과 악인악과의 인과설은 인도뿐 아니라 동서고금에 있는 관념이다. 그러나 선이나 악의 행위가 그 결과를 이끌기까지의 사이에 그것은 어떠한 상태로 존속하는 것인가, 또 원인과 결과와의 관계는 어떠한 것인가하는 점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업보사상에서는 원인과 결과와의 연쇄가 반드시 동일 인격내에 즉 자신에거 한정되는 것으로 스스로 행하여 스스로 그 결과를 부른다고 하는 자업자득의 원칙이 있다. 이 경우 원인으로서의 선악의 행위가 그 결과를 이끄는 것은 그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인과의 연쇄는 전세(前世), 금세(今世), 내세(來世)라고 하는 삼세(三世)에 걸쳐서 행해지는 것으로 되어 있다.

선인은 사후에 천국락토(天國樂土)에 태어나고, 악인은 악계지옥(惡界地獄)에 떨어진다는 사고는 인도에서는 이미 불교 발생 수백년 전 아타르바베다 시대부터 브라흐마나 시대에 걸쳐서 존재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윤회설로까지 발전하지는 않았었다. 윤회설은 삼세에 걸쳐 다시 태어나고 다시 죽음으로 해서 여러 세계를 거쳐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 등 삼계(三界)와 지옥(地獄), 아귀(餓鬼), 축생(畜生) , 아수라(阿修羅), 인간(人間), 천상(天上) 등 육도(六道)에 걸쳐 윤회한다고 한다. 이 윤회설이 성립한 것은 불교 발생 2, 3백년 전인 우파니샤드 시대라고 여겨진다.

석존은 당시의 사문고 바라문들이 인간의 길흉화복의 원인을 설명함에 있어 올바른 업보설을 채용하지 않고 그릇된 주장을 내세우고 있다고 보고, 그 주장을 다음의 다섯 종류로 분류하였다.



첫번째 자재화작인설(自在化作因說)은 신의설(神意說)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정통 바라문의 주장이 이에 해당한다. 그것은 이 세계도 인간의 운명도 모두 범천(梵天)이나 자재천(自在天) 등의 최고신이 화작창조(化作創造)하였다고 하는 것으로, 모든 것은 신의 의지에 좌우된다고 하는 주장이다. 여기에서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인정되지 않으며 따라서 우리가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수행하는 것도 의미가 없는 것으로 된다. 세상의 일은 우리의 의지나 노력에 따르는 것이 아니고 신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두번째 숙작인설(宿作因說)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받는 행복과 불행의 운명은 모두 우리가 과거세에서 행한 선악업의 결과로 얻어진 것이며, 인간의 일생에 있어서 운명은 전세의 업의 결과로서 우리가 태어난 때에 이미 정해져 있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선악의 행위를 하고 노력을 기율여도 그것은 내세의 운명을 규정하는 원인을 될 수 있을지언정 현세의 운명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고 하는 것으로 일종의 숙명론이다.



세번째 결합인설(結合因說)은 이 세계 인생의 모든 것은 지수화풍 등의 몇 가지 요소의 결합에 의해 발생하고 그 결합 상태의 좋고 나쁨에 의해 인간의 길흉화복이 정해진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이 결합상태는 우리가 태어난 때에 이미 확정되어 그것이 한평생 일정불변하게 존속하기 때문에 금세의 우리의 노력에 의해 운명을 변화시킬 여지는 전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결합인설도 일종의 숙명론이라고 할 수 있다.



네번째 계급인설(階級因說)은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흑(黑), 청(靑), 적(赤), 황(黃), 백(白), 순백(純白)의 여섯 가지 계급으로 구별되어 있어, 그 계급에 따라 인간의 성격, 지혜, 환경, 가계 등이 결정된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도 일종의 숙명론으로 후천적인 인간의 노력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다섯번째 우연인설(偶然因說)은 무인무연(無因無緣)설이라고도 하는데, 이 설에 의하면 사회, 인생의 운명은 인과업보의 법칙에 지배되는 것이 아니며 또 신의 은총이나 징벌에 의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길흉화복은 일정한 원인이나 이유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완전히 우연한 기회에 의해 일어나는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사상계가 혼란한 당시의 인도에서는 위와 같은 여러 학설이 횡행하였기 때문에 인과업보의 설도 일반적으로 유행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이같은 업보윤회설에는 많은 장점이 있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을 숙명론적으로 이해하고 체념할 수 있는 소지도 많다. 현재의 상황은 과거의 행위로 설명될 수 있지만 그러나 현재의 삶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자유의지와 노력에 따라 운명도 조금씩 변화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업보윤회설에 있어 불교의 특징은 윤회의 주체로서 영혼을 인정하지 않고, 업 자체가 윤회한다고 하는 것이다.



2. 부파불교

부파불교란 초기교단이 상좌부와 대중부로 분열한 이후의 전통적인 교단의 불교를 말한다. 불멸 100년 경에 초기교단에 십사(十事)에 대한 논쟁이 일어나, 이로부터 상좌부(上座部)와 대중부(大衆部)로 나뉘었는데 이를 근본분열이라고 한다. 이어서 상좌부와 대중부 각각에서 다시 분열을 되풀이한 것을 지말분열이라고 한다. 상좌부는 7회의 분열에 의해 11부로 나뉘었고, 대중부는 본말을 합해 9부이기 때문에 상좌부와 합해서 20부가 된다. 그래서 근본의 2부를 제외하고 18부의 분열이라고 한다. 이 가운데 가장 발달한 것이 설일체유부로서 부파불교의 교리는 대개 이 부파의 교리를 말한다.

당시에 재가신자는 교단 밖에 있었지만 그들이 어떠한 종교활동을 했는지 분명하지 않다. 불타가 탄생한 곳, 성도한 곳, 초전법륜한 곳, 반열반한 곳 등이 일찍부터 영장(靈場)으로써 존숭되고 불타를 추모하는 사람들이 순례하는 성지로서 각광을 받았다. 초기불교시대부터 신자들의 종교활동은 활발했던 것이다. 또한 불멸 직후 팔왕분골(八王分骨)에 의해서 중인도의 각지에 불탑이 세워졌는데 그 때 불교의 유해를 화장하고 사리를 분배하여 탑을 세운 것은 모두 재가신자였다. 그 불탑들은 비구들이 거주하는 정사에 세워진 것이 아니다. ‘사대로(四大路)에 여래의 탑을 건립하라’고 설해짐으로써 탑은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광장에 건립되었다. 이 탑들은 신자들이 자주적으로 관리하고 신앙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육왕경> 등에 의하면 아쇼카왕은 팔왕분골의 탑을 개방하여 불타의 사리를 인도전역으로 분산시켜 많은 탑을 세웠다고 한다. 왕이 많은 불탑을 세운 것은 당시 불교도들 사이에 불탑신앙이 성행하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 요구에 부응하여 왕은 불탑을 건립했을 것이다.

후세의 대승불교의 발전의 원류를 생각하는 경우에는 근본불교시대부터 불탑교단에서 배양되고 있던 불타신앙과 불덕찬양운동을 더듬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신자들의 신앙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불교교단의 정계(正系)는 초기교단을 계승하는 부파교단이었다. 즉 불타의 직제자인 대가섭이나 아난 등에 의해 수지된 불교는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로 계승되어 부파교단으로 발전한 것이다. 따라서 부파교단의 불교는 ‘제자의 불교, 배우는 불교’이며 남에게 가르치는 입장의 불교는 아니다. 이러한 수동적인 불교였기 때문에 대승교도들로부터 성문승(聲聞乘)이라고 불렸다. 성문이란 불타의 말씀을 들은 사람, 즉 제자라는 뜻이다.

부파불교 교리의 특징은 출가주의라는 점이다. 출가하여 비구가 되고 계율을 엄격하게 지키면서 수행한다. 재가와 출가의 구별을 엄격히 하고, 출가를 전제로 하여 교리나 수행형태를 조직하고 있다. 다음으로 부파불교는 은둔적인 승원불교이다. 그들은 승원에서 금욕생활을 하고 학문과 수행에 전념하다 따라서 거리의 불교는 아니었다. 타인의 구제보다는 먼지 자기의 수행의 완성을 목표로 삼았다. 그 때문에 대승교도로부터 소승(小乘)이라고 불리고 천시되었다. 이처럼 그들이 생활대책 때문에 걱정하는 일이 없이 오로지 수행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은 승원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불교의 출가교단을 국왕이나 왕비 혹은 대상인 등의 귀의와 경제적 지위를 받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상인계급도 불교승단을 지원하였다. 상인은 커다란 밀림을 지나고 사막을 가로질러 먼 곳에 있는 도시와 교역을 하거나 혹은 배를 타고 큰 바다로 나가 다른 나라와 통상을 했다. 이러한 통로에는 수많은 곤란과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러한 위험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냉철한 판단력과 용기와 인내가 필요하였다. 이성적인 종교인 불교가 그들의 취향과 합치했던 것이다. 또한 그들은 타국으로 가서 이민족이나 다른 계급과 자유로이 교제해야만 했기 때문에 카스트제도를 엄격히 지키는 바라문의 종교는 적당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대해 농민은 바라문교와 강하게 결부되어 있었다. 상인계급 중에는 부파교단 뿐만 아니라 대승교단에 귀의한 사람들도 많은데 그들 중 부상(富商)이나 지도자를 장자(長者)라고 한다. 장자로서는 불타에게 귀의한 급고독(給孤獨)장자나 우그라장자 등이 유명한데 초기불교시대부터 불교신자로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장자는 많다. 대승경전에서도 장가가 불타의 설법의 대상으로 종종 등장한다. 그들은 부파교단도 지원했을 것이다. 이처럼 국왕이나 장자들의 원조에 의해 승단은 생활 걱정없이 출세간주의를 관철하여 연구와 수행에 주력했으며, 이로써 분석적이고 치밀한 불교교리를 완성시켰다. 이것이 아비달마(阿毘達磨, Abhidharma;법에 대한 연구) 불교이다.



아비달마(阿毘達磨) 불교의 발달

일반적으로 아비달마 논서에는 세 가지 발달 단계가 있다. 그 첫째 단계에서는 경장(經藏) 가운데서 이미 교법을 정리, 조직하기도 하고 해설이나 주석을 하기도 한 부분을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은 아직 진정한 의미에서의 아비달마는 아니며 경장 가운데 아비달마적 경향을 띠고 있다고 할 만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발달하여 두 번째 단계에 이르면 아비달마(藏) 즉 논장(論藏)으로서 경장에서 독립하는데, 거기에서는 교법의 조직이나 해석이 더욱 더 촉진되었다. 다음 세 번째 단계에서는 그것이 촉진된 결과 아비달마는 단순히 아함경(阿含經)을 해석하거나 조직하는데 머물지 않고 나아가 그러한 기초 위에서 장대한 교의체계를 구축하였던 것이다.

아함경전의 내용은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즉흥적, 우연적 요소가 많았던 석존의 교설을 그가 입멸한 후 정리하여 전승한 것이기 때문에 본래 짧고도 단편적인 경의 집성이다. 그러한 비체계적인 아함의 경설이 점차 정리되고 조직화되어 하나의 교의체계가 만들어진 것이다.

아함 가운데 나타나는 아비달마적 요소로서는 대개 두 가지 종류를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교설 속의 어구에 대해 주석적으로 설명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갖가지 교설을 정리하고 배열, 조직하는 것이다. 석존의 교법은 일반적으로 쉬운 말로 이야기되며 특이한 용어나 난해한 어구가 사용된 적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때에 따라서 석존 자신이 청중을 위하여 그가 사용한 말의 의미를 설명하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며 또 어떤 때에는 석존이 설법을 마친 후 청중 가운데 선배가 후배에게 스승의 말씀에 대하여 해설하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석존이 입멸한 후 시대가 지남에 따라 또 불교가 전파된 지역이 확대됨에 따라 교설 속의 어떤 어구에 대해 주석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더욱 더 많아지게 되었을 것임은 분명하다.

아함경전에서는 석존 자신이 그러한 주석적인 설명을 하고 있는 경우도 있고 설법을 마친 후 제자 가운데 뛰어난 사람이 그것을 해설하는 경우도 있으며, 또 두 사람의 유력한 제자가 서로 대론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그 어느 것이든 그렇게 이루어진 설명과 해석을 옆에서 듣고 있는 자가 훗날 그 상황을 이야기하는 형식을 기술하는 것이 아함경전의 원칙이다. 그러나 형식은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설명과 해석 모두가 석존 재세시대에 이루어졌다고는 볼 수 없다. 오히려 그 중 상당부분은 석존이 입멸한 후 승단 내부에서 점차로 발전한 아비달마적 연구에 의해 부가되어진 해석일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부가된 부분이 점점 더 증대하여 마침내 아함경전 속에 도저히 포함시킬 수 없을 만큼 되었을 때 아함으로부터 분리 독립되었으며, 여기서 아비달마라고 하는 불교성전의 새로운 장르가 성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교설이 정리, 조직되었다고 하는 측면에서 볼 때 그러한 방식으로서 두드러진 것은 숫자와 관계있는 교설을 그 숫자대로 정리하여 일법(一法), 이법(二法), 삼법(三法)과 같은 순서로 배열하는 방법과 교설을 내용에 따라 분류, 구별하여 동일한 주제를 가진 것들을 모아 한 곳에 정리, 배열하는 방법이 있다. 전자를 ‘법수(法數)’에 의한 정리라 하고, 후자를 ‘상응(相應)’에 의한 정리라고 한다. 각각의 짧은 경 가운데에는 법수에 의해 정리되고 있는 경우도 있고, 몇 개의 짧은 경을 모은 경전군에다가 그러한 방법을 적용시킨 것도 있다. 또 다수의 경전군을 모아 동일한 방법으로 전체를 정리한 것이 증지부(增支部), 증일아함(增一阿含)이다. 상응에 의해 정리하는 방법은 짧은 경 안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경전군상에는 그것을 적용시킨 예는 많은데 다수의 경전군을 그 같은 방법으로 정리한 것이 상응부(相應部), 잡아함(雜阿含)이다.

경장(經藏)은 그것이 승단 안에서 전승되는 동안 거기서 아비달마적 연구가 고조됨에 따라 점차 이같은 부가, 증가, 정리, 안배가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현존하는 경장을 보면 그 중에는 원초적이고도 간결한 교설을 그대로 전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부분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아비달마적 경향이 진전되어 이제 거의 하나의 아비달마 논서와 구별할 수 없을 정도의 내용이나 형식을 갖추고 있는 부분도 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경장 안에서 점차 아비달마적 경향이 발달하여 마침내 독립된 아비달마 논서가 형성되었다. 즉 아비달마발전의 두 번째 단계에 들어선 것이다. 이렇게 하여 성립한 최초기의 아비달마는 아함 속의 아비달마적 경향이 가장 두드러진 부분과 비교할 때 질적으로 그다지 큰 차이는 없다. 주로 아함에 나타난 그러한 경향을 각 부파에서 그대로 연장, 발전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 내용에 있어서도 각 파 사이에 공통된 점이 많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이미 각 부파의 독특한 교의학설을 반영한 특수한 용어나 특수한 해석이 적지 않게 드러나 있다는 사실에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단 독립한 아비달마 경장은 순조롭게 발달하여 마침내 아함 경전의 연장적인 입장에서부터 완전히 벗어나 서서히 새로운 형태의 논서를 만들어 내게 되었다. 부파적 색채는 점차 농후해지고 술어를 독특하게 해석, 정의하였으며 여러 가지 개념들의 상호관계에 대한 극단적일 정도의 자세한 분석적 고찰이나 개개의 문제에 대한 전문적 연구 등이 두드러지게 발달하였다. 그리고 아비달마 발전의 세 번째 단계에 이르러 그러한 교설을 조직적으로 논술하는 웅장한 구성을 지닌 논서가 출현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름아이콘 금란지교
2017-01-08 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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